재일조선인이란?
내 아버지 서승춘은 1928년, 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를 따라 한반도 충청남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 나는 그의 넷째 아들로 1951년 교토시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나는 재일조선인 2세다.
이처럼 글로 쓰면 단 몇 줄이지만, 여기서 벌써 번잡스러운 주석을 덧붙여야만 다음으로 나갈 수가 있다. ‘재일조선인’이라는 개념에 대한 인식이 공유되지 않은 상태기 때문이다.
현재의 일본 사회에서는 ‘재일한국인’이라는 호칭과 ‘재일조선인’이라는 호칭이 애매하게 뒤섞여 존재하는데, 후자를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 혹은 북조선으로 줄임) 출신자’ 혹은 ‘북한 국민’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동시에 ‘재일한국·조선인’이라든가 ‘한국어’라는 말도 자주 쓰이는데 이들 용어는 모두 재일조선인이 형성된 역사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조선’과 ‘한국’은, 전자는 ‘민족’을 후자는 ‘국가’를 나타내는 용어이며 관념의 수위가 다르다. 혼란은 이와 같은 개념상의 구별이 애매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인데, 그 배경에는 ‘민족’과 ‘국민’을 동일시하는 것에 의구심을 갖지 않는 단일민족국가 환상이 뿌리 깊게 가로놓여 있다.
조선 민족의 생활권은 현존하는 국가들의 경계를 넘어, 조선반도의 남죽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 중국, 구소련의 중앙아시아 국가들, 북미, 유럽, 중남미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그 사람들을 뭐라고 총칭할 것인가. 나는 현재로서는 ‘조선인’이라는 말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데, 한편에서는 ‘한국인’이나 ‘한인’이라고 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최근 일본에서는 외래어표기 문자인 가타카나로 ‘코리언’コリアン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구소련의 조선 민족은 스스로를 고려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민족의 호칭 문제 하나를 보아도 속 시원한 통일은 어렵다. 이런 상황 자체가 식민지배, 민족분단, 민족이산을 경험해온 조선 민족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한국인’이라는 말을 민족의 총칭으로 삼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이란 민족 전체의 광대한 생활권의 관점에서 보면, 그 일부를 차지할 뿐인 국가의 호칭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인’이라는 호칭은 국민적 귀속을 나타내는 한정된 의미로 사용되어야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재일조선인 2세지만, 국적은 ‘한국’이다. 내 경우 민족적으로는 ‘조선인’이며 국민으로서는 ‘한국인’인 것이다.
모어와 모국어
나의 모어母語는 일본어지만 모국어母國語는 조선어다. ‘조선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한국어’라고 하면 한국이라는 한 국가의 ‘국어’를 가리키게 되기 때문에 민족어의 총칭으로서는 ‘조선어’라는 말이 적합하다.
... 다나카 가쓰히코田中克彦에 따르면 모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익혀 자신의 내부에서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말이며 한번 익히면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근원의 말”이다. 통상 그것은 모친으로부터 아이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모어’라고 한다. (『ことばと國家』, 岩波新書, 1981)
한편 모국어란 자신이 국민으로서 속해 있는 국가, 즉 모국의 국어를 가리킨다. 그것은 근대 국민국가에서 국가가 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구성원들에게 가르쳐, 그들을 국민으로 만드는 장치이다. 모어와 모국어가 일치하는 경우는 국가 내부의 언어 다수자들뿐이며, 실제로 어느 나라에든지 모어와 모국어를 달리하는 언어 소수자가 존재한다. 그 존재를 무시하거나 망각하고, 아무런 의심 없이 모어와 모국어를 동일시하는 것도 단일민족국가의 환상의 소행이라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언어 소수자란 하나의 국가 내부에서, 그 나라의 다수자와는 다른 모어를 가진 사람들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 일본이 조선을 지배했던 시기, 일본은 조선 사람들의 모어를 부정하고,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치는 정책을 철저히 고수했다. 즉, 당시의 조선 사람들은 대일본 제국의 언어 소수자였다.
게다가 재일조선인의 경우, 사태는 한층 더 복잡하게 꼬여 있다. ... 재일 조선인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일본어를 모국어로 해서 성장한다. 즉 재일조선인은 일본의 다수자 쪽에서 보면 같은 모어를 지닌 소수 민족(에스닉 마이너리티)이며, 본국(한국 또는 북한)에서 보면 같은 민족이면서 모어를 달리하는 언어 소수자인 셈이다. 식민지 피지배자의 후손이면서, 구식민종주국에서 태어난 탓에, 지배자의 국어를 모어로 하는 아이러니컬한 운명을 짊어진 것이다.
재일조선인과 국적
... 일본이라는 국가는 우리들 재일조선인의 지역참정권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일본인은 결코 많지 않다. 그뿐 아니라 우리들이 일본 국민과 똑같이 세금을 납부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 우리들 재일조선인은 ‘일본인’이 아니다. ...
재일조선인은 크게 나와 같은 ‘한국 국적 소지자’, ‘조선적 소지자’, ‘일본 국적 소지자’의 세 분류로 나뉜다. 여기서 ‘한국 국적’ th지자란 사실상, ‘한국 국민’과 거의 동일한 의미이다. 그럼 ‘조선적’ 소지자는 북한의 국민인가 하면 그렇지가 않다.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1910년대 이후 조선 사람은 ‘야마토大和 민족’과 똑같은 천황의 ‘신민’이 되어, 싫건 좋건 일본 국적을 지니게 되었다. ...
당시 조선 사람과 ‘야마토 민족’ 간에는 가혹한 차별이 존재했지만 적어도 국적상 조선 사람은 ‘일본 국민’이었으며, ‘일본 국민’으로서, 일본 내지뿐 아니라 중국 대륙과 사할린, 남양군도에 이르기까지 대일본 제국이 식민지배와 점령의 촉수를 뻗친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나아가 1939년 이후의 총력전 시기에는 대략 70만 내지는 10만의 조선인 노동자가 내지의 탄광, 광산, 토목공사 현장, 군수공장 등으로 강제로 동원되었다. 그 결과 1945년 일본 패전시에는 적게 잡아도 230만 이상의 조선인이 일본 내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은 패전 후 즉각 재일조선인을 비롯한 구식민지 출신자들의 일본 국적이 연합국과의 강화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 유효하다는 견해를 표명하고, 구식민지 출신자도 일본 국민과 마찬가지로 일본국의 법에 복종할 의무가 있음을 강조했다. 재일조선인이 자력으로 설립·운영하고 있던 민족학교를 폐쇄하도록 명한 것도 이런 논리에 따른 조처였다. 그러던 중 1947년, 재일조선인을 “외국인으로 간주한다”는 외국인등록령이 선포되었다. 이것이 쇼와昭和 천황 최후의 칙령이었다.
‘외국인’으로 간주된 재일조선인들은 외국인등록 수속을 할 때, 자기의 ‘국적’을 신고하고 기입해야 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한반도에서 민족분단을 둘러싼 대립이 심화된 상태로, 조선 사람들의 독립국가는 아직 성립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국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국적을 신고하라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많은 재일조선인은 국적란에 ‘조선’이라고 기입했다. 그것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국민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조선반도 출신, 조선 민족의 일원이라는 의미, 즉 국적이 아니라 민족적 귀속을 나타내는 기호였다.
일본 국적의 박탈
이듬해인 1948년, 38선의 남과 북에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국가 수립을 선언했다. 마침내 일본으로부터 독립했는데 서로 격렬하게 대립하는 분단국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1950년에는 조선전쟁(한국전쟁)이 발발해, 1953년의 휴전협정에 이르기까지 전투가 계속되었다. 일본 패전 후 7년째인 1952년, 전쟁이 한창이던 그때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조약의 발효와 함께 재일조선인들·구식민지 출신자들은 일본 국적 상실을 일방적으로 통보받았다. 강화조약 회담장에는 한국․북한․재일을 불문하고, 조선인 대표는 일체 참가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당사자인 조선 사람들의 의향은 전혀 묻지 않은 채, 국적 상실 선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식민지 시대에 한반도에서 일본에 건너온 사람, 강제로 연행된 사람, 그 자손으로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 모든 재일조선인이 한순간에 사실상 난민이 되었다.
그후 시간의 경과와 함께 재일조선인 가운데 외국인등록상의 국적란을 ‘조선’에서 ‘한국’으로 고치는 사람들이 서서히 늘어갔다. 재일한국인의 대부분은 조선반도(한반도) 남쪽 출신이다. 지금은 한국의 영토인 그 지역에 고향이 있고 친척과 연고자들이 살고 있으며 조상의 산소도 있다. 그런데 냉전 체제 속에서 한반도의 남북분단 상태가 고착화된 탓에, ‘조선적’인 채로는 고향에 오고갈 수도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북한과의 대립을 강화하는 한편, 1965년 한일조약을 체결하며 한국만을 상대로 국교를 맺었다. 이 조약의 최대 문제점은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의 책임을 마지막까지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큰 문제는 재일조선인의 거주권 부분에서 ‘한국 국적’과 ‘조선적’ 간에 부당한 차별을 두어, ‘조선적’을 유지하는 사람들에게 지극히 불안정한 법적 지위를 강요한 것이다.
‘조선적’에서 ‘한국 국적’으로의 기재변경은, 대한민국에 국민등록을 해야 한다는 조건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즉 남과 북으로 나뉜 분단국가 중에서 남쪽의 국민으로 귀속할 것을 강요한 것이다. 외국인등록상의 ‘한국’이라는 기호가 사실상 한국 국적을 의미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시점을 달리해보면 재일조선인이라는 집단은,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가 합작해 행사한 압력에 의해 둘로 갈라져, 한편은 난민 상태를 강요당하고, 다른 한편은 한국 국민이라는 틀 안에 갇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여전히 ‘조선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 중에는 자각적으로 북한의 국민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본시 조선은 하나’라는 생각을 소중히 간직하려는 사람들, 재일조선인의 형성된 역사의 기록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 자발적인 난민으로서 기꺼이 불리한 지위를 택하고자 하는 사람들, 또는 단지 기재변경을 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 등 다양한 입장이 뒤섞여 존재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 자신은 ‘한국 국적’ 소지자다. 아버지가 일찍이, 아마도 1960년대 전반에 ‘한국 국적’으로 기재변경을 한 것이다. 국적이 한국인 나는, 일본에서 태어났고 자라 일본에 집과 직장이 있지만, 한국 여권이 없으면 일본에서 해외로 나갈 수가 없다. 또한 일본 정부의 재입국허가가 없으면 내 집으로 돌아올 수도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경우 나를 외교상으로 보호할 의무가 있는 것은 일본 대사관이나 영사관이 아니라, 한국의 재외공관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정마로 나를 보호해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한국이 군사정권하에 있던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에 있던 나의 두 형은 정치범으로 투옥되어 있었다. 한국 정부는 당시, 여권발급 업무를 재외국민 통합을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정부적이라고 간주된 사람에게는 쉽게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았다. 내 경우 여권 신청을 할 때마다 영사로부터 ‘면담’을 요구하는 호출이 있었다. 그 영사는 당시 하s국의 중앙정보부라는 부서에서 파견된 정보대책․치안대책 전문 관리였다. 호출에 응해 면담을 가면, 옥중의 형들을 전향시켜 협력하게 하라는 등의 요구를 했다. 호출에 응하지 않으면 1년이고 2년이고 그대로 방치해두는 것이다.
갖은 불쾌한 경험을 하고 어찌어찌 여권을 손에 넣어, 해외에 나갈 수 있게 된 나는 설사 어떤 재난에 부닥치더라도 한국 대사관에만은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항상 극도로 긴장해 있었다. 형들을 투옥해 고문하고 있는 정부가 나를 보호해주리라고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믿어도 될까, 나는 아직도 안심할 수 없다.
무국적 상태
‘조선적’을 가진 재일조선인은 현재까지도 사실상 무국적 상태다. 예외적으로 북한의 여권을 취득한 사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여행·유학·상용 등의 목적으로 해외에 나갈 때는 여권 없이 일본국이 발행하는 ‘재입국허가증’만을 가지고 출국하게 된다. 만약 해외에서 불의의 사고나 사건을 당해도 외교보호권을 행사해줄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 속의 붕어
... 루쉰은 이런 말을 했다.장자는 “말라가는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 속의 붕어는 침으로 서로의 몸을 적신다”고 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덧붙였다. “흐르는 물과 넓은 호수에서 서로를 잊어버리는 게 낫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는 서로를 잊을 수가 없다.
루쉰이 만년에 쓴 <나는 사람을 속이고 싶다>의 한 구절이다. 일본어로 쓴 이 글은 잡지 <<카이조>> 1936년 4월호에 게재되었다.마지막을 앞두고 피로 개인의 예감을 덧붙여 써 감사를 표합니다.
루쉰은 이 글을 발표한 해 10월에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인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나 일본과 중국 사이에 전면 전쟁이 시작되었다. 글 속의 우리란 중국 사람과 일본 사람을 뜻하는 것이리라. 일본인에게 보낸 유서라고도 할 수 있는 글이다. 그야말로 피로 쓴 것 같은 이 글은 언제부터인지 내 머리를 떠나지 않게 되었다. ...
... 루쉰의 글 속에 나오는 “우리들”은, 조선 사람과 일본 사람으로 바꿀 수도 있을 듯하다. 슬프게도 조선 사람과 일본 사람은 서로를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옛날 강과 호수에 있던 우리들의 조상은, 식민지배라는 홍수의 시대에 일본이라고 하는 수레바퀴 흐름 속으로 끌려들어간 것이다. 큰물이 빠진 후 강호로부터 떨어져 나온 수레바퀴 자국 웅덩이 속에 우리들은 남았다. 지글지글 물은 말라간다. ...
그렇게 일본이 살기 힘들다면 왜 일본으로 돌아오는가? 왜 일본을 영영 떠나지 않는가? 이렇게 묻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인다. 천진하게 물어보는 사람도 있고, 싫으면 나가라는 듯이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재일조선인들 중에는, 일본이 정말로 싫어져 해외이주를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들은 경제력이나 특별한 능력을 지닌 소수뿐임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수 있다.
재일조선인의 대다수가 일본 식민지배의 결과 의도하지 않은 채 이 나라에서 태어났다. 때문에 이 나라의 언어밖에 모르고, 여기밖에는 집이 없고, 여기밖에 직장이 없고, 여기밖에는 친구도 아는 사람도 없다. 다시 말하면, 삶의 기반이 여기 외에는 없는 것이다. 어떤 때는 완곡하고 부드러운 말로, 어떤 때는 거친 목소리로 싫으면 나가라고 하는 말을 들어가면서, 그래도 여기밖에는 살 곳이 없는 것이다.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디아스포라 기행─추방당한 자의 시선》, 돌베개, p. 15-30
at 2007/06/18 18:03



덧글
양철북 2007/08/07 14:14 # 삭제